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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훌리건 문화와 축구 사랑 – 양면성 속의 열정

by 나무와나무 2025. 6. 16.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은 축구의 본고장이라 불릴 만큼, 이 종목에 대해 깊은 애정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리그이며, 각 구단은 단순한 스포츠 팀이 아닌 지역 정체성 그 자체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영국의 축구 문화에는 오랜 세월 양면적인 특성이 존재해 왔습니다. 한쪽에는 팀과 선수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과 충성심이, 다른 한쪽에는 폭력과 무질서의 상징으로 오랜 시간 지적되어 온 '훌리건 문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국의 축구 사랑이 어떻게 훌리건 문화와 얽히고설켜 발전해 왔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변화, 그리고 오늘날의 팬 문화까지 입체적으로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영국의 훌리건 문화와 축구 사랑
영국의 훌리건 문화와 축구 사랑

 

훌리건 문화의 기원 – 사회적 분열의 발현

훌리건(Hooligan)이라는 단어는 원래 19세기 후반 영국 런던의 언론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훌리건 가족(Hooligan Family)’이라는 이름의 실존 폭력 조직을 보도하면서 이 단어를 처음 대중화했으며, 점차적으로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하는 청년 무리’라는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이 단어는 점점 특정한 문화적 함의를 갖게 되었고, 특히 축구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훌리건’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습니다.

훌리건 문화의 본격적인 형성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영국 사회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적 침체를 겪었던 시기이며, 중공업 쇠퇴, 대량 해고, 실업률 상승, 도시 슬럼화 등으로 인해 도시 노동계층의 삶의 질이 급격히 악화되던 때였습니다. 특히 북부 공업 도시들과 런던의 외곽 지역은 청년층 실업과 주거환경 악화가 심각했으며, 정부와 사회 제도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청년들은 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축적하게 되었고, 그 분출구가 필요해졌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축구장이 ‘탈출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축구는 영국의 대표적인 대중 스포츠로, 특히 노동계급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지역 클럽은 단순한 팀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특정 축구 클럽을 지지한다는 것은 곧 지역 소속감을 확인하고, 계급적 자존심을 표현하는 행위였으며, 팬들은 이를 통해 소속된 집단의 ‘자부심’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속감은 긍정적인 연대감만을 낳지 않았습니다. 라이벌 구단 팬들과의 적대감은 점차 증폭되었고, 단순한 응원 경쟁이 물리적 충돌과 폭력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첼시와 토트넘, 밀월과 웨스트햄 같은 지역 라이벌 관계는 축구가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도시 간, 계층 간 전쟁의 형태로 격화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경기를 중심으로 결성된 소규모 팬 조직들은 점차 조직화된 폭력 집단으로 진화했으며, 사전에 약속된 장소에서 팬들끼리 집단적으로 충돌하는 ‘프리 어레인지드 파이트(Pre-arranged fight)’는 훌리건 문화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들은 응원단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실상은 폭력과 시위, 도시 내 무질서 유발을 일삼는 조직화된 청년 하위문화였으며, 축구 자체보다 '싸움'을 위해 경기장을 찾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경기장 내외에서의 난투극, 기차역이나 펍에서 벌어지는 단체 폭행, 심지어는 경찰과의 충돌은 영국 사회에 있어 심각한 치안 문제로 비화되었고, 해외 경기 원정 중에도 폭력 사건이 다수 발생하면서 국제 사회에서도 비난이 거세졌습니다. 1970~80년대 초반은 영국 축구가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한 시기였고, 이는 훌리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해외 원정 경기에서는 영국 팬들의 폭력성이 두드러졌으며, 이는 영국의 국가 이미지와 축구 자체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훌리건 문화는 단지 경기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당시 영국 사회의 분열 구조, 계급적 좌절, 도시 빈곤과 배제의 결과물이었으며, 하나의 사회병리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이를 ‘노동계급의 정치적 무력감이 문화적 저항으로 표출된 사례’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즉, 훌리건은 그 자체로 비난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해와 분석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폭력은 단지 스포츠와 관련된 감정의 격앙이 아닌, 실업과 차별, 계층 간 벽에 대한 비이성적 반항이었으며, 사회적 좌절의 축적이 만들어낸 집단심리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훌리건 문화는 단순한 축구 팬 문화의 과열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구조적 결핍의 상징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원과 형성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이후에 이루어진 영국 축구 문화의 개혁, 경기장 안전 제도, 팬덤의 변화, 사회 통합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1980년대 대참사와 공공질서 회복 노력


영국 훌리건 문화의 정점을 찍은 사건 중 하나는 1985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유벤투스와 잉글랜드 리버풀 FC 간의 경기에서, 리버풀 훌리건들이 철제 울타리를 넘어 유벤투스 팬들을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39명이 압사당하는 참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으며, 유럽축구연맹(UEFA)는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을 무기한 금지시키는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이후에도 1989년 힐스버러 참사에서는 안전 관리 부실로 인해 96명의 리버풀 팬이 사망하면서, 단순한 훌리건 문제를 넘어서 경기장 안전, 팬 인권, 공공질서 전체에 대한 구조적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참사를 계기로 영국 정부와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은 축구장을 포함한 스포츠 시설의 안전성과 팬 문화 개선을 위한 전방위적인 개혁에 나서게 됩니다. CCTV와 출입 통제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고, 좌석 전면 지정제 및 스탠딩 응원 금지 조치를 시행했으며, 경기장 내 술 판매도 엄격히 제한하게 됩니다. 동시에 훌리건으로 지목된 인물에 대한 입장 금지 조치 및 현장 체포를 강화하였고, 경찰과 협력하여 문제 관중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축구장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노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고, 잉글랜드 축구장은 더 이상 폭력의 온상이 아닌, 가족 단위 관중도 안심하고 방문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훌리건 문화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이는 프리미어리그의 글로벌 흥행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팀을 넘어선 정체성 – 진화하는 팬덤과 축구 사랑


훌리건 문화가 점차 사라져 가는 동시에, 영국 내 축구 팬덤 문화는 한층 더 조직화되고 문화적으로 성숙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프리미어리그의 상업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팬들의 응원은 더 이상 소수의 과격 지지자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팬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팀에 대한 애정은 단지 지역 소속감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 문화적 자부심, 공동체의식으로 확장되었고, 팬들은 선수와 팀을 넘어 하나의 '클럽 문화'를 소비하고 공유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팬 문화의 진화는 팀 응원가, 역사, 클럽의 철학까지 관심을 갖는 ‘심층 팬층’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단순한 경기 결과보다도 선수단 구성, 유소년 시스템, 사회공헌 활동, 지역 커뮤니티와의 관계 등 팀이 어떻게 존재하고 운영되는지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리버풀 FC의 "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응원가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팬들과 선수 간의 유대, 도시의 정체성, 심지어는 사회적 연대감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기능합니다.

또한 영국의 클럽 팬들은 경기장 내에서만이 아니라 SNS와 팬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들의 응원 문화, 분석 콘텐츠, 창작물을 공유하면서 팬덤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영국 축구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훌리건적 팬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새로운 세대의 팬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 내 훌리건 문화는 표면적으로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경기장 내 폭력 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으며, 법적 처벌과 제도적 안전장치가 상당 수준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훌리건 정신'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정 빅매치나 더비 경기에서는 여전히 팬들 사이에서 지역감정과 팀에 대한 격한 감정이 분출되며, 때때로 거리 응원이나 경기장 밖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훌리건 문화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과거의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온라인상에서의 조롱, 혐오 표현, 사이버 폭력 등으로 전환된 디지털 훌리건리즘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종차별적 댓글이나 특정 선수에 대한 온라인 공격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며, 프리미어리그와 영국 정부는 이를 차단하기 위해 온라인 플랫폼들과 협력하여 대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극단적 팬 그룹은 여전히 '올드 훌리건 시대'의 잔재를 계승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를 낭만적으로 미화하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영화 <그린 스트리트 훌리건스>처럼 훌리건 문화를 주제로 한 콘텐츠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오히려 이를 과거의 향수로 소비하는 문화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는 일정 부분 이해 가능한 현상이지만, 그로 인해 폭력적 응원이나 과격한 충성심이 재생산되지 않도록 팬덤과 사회 모두의 경계와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됩니다.

 

결론 : 영국의 축구 문화는 독보적입니다


영국의 축구 문화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와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훌리건 문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고, 동시에 이를 극복해낸 구조적 진화와 팬 의식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훌리건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비행 청소년이나 폭력적 팬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0세기 영국 사회가 겪은 계급 갈등, 정체성 혼란,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축구라는 종교적 공간을 통해 분노와 소속을 해소하려던 집단적 표출이었습니다. 축구장이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지역과 계층의 자존심을 걸고 상징적으로 싸우는 공간이 되었던 그 시대의 풍경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축구 팬들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과거의 폭력적 열정은 질서와 문화로 대체되었고, 프리미어리그는 이제 글로벌 스포츠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변화된 팬덤의 역할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소비자나 구경꾼이었던 팬들이 이제는 클럽의 존재 이유가 되었으며, 팬덤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팬들은 이제 선수와 함께 팀을 만들어가고, SNS를 통해 전술 분석부터 구단 비판까지 목소리를 내며 클럽의 방향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역 클럽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주체적인 팬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훌리건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전히 일부 경기에서는 감정이 격해지고, 디지털 공간에서는 혐오와 분열의 표현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국 사회가 이를 ‘없애야 할 과거’가 아니라 ‘성찰하고 정비해야 할 유산’으로 인식하며, 문화와 법률, 교육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지 축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스포츠와 사회가 어떻게 건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축구는 단지 골을 넣고 이기는 경기를 넘어, 공동체의 가치, 다양성의 존중, 연대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영국은 훌리건 문화라는 아픈 역사 위에 문화적 재생을 이뤄냈고, 그 결과 지금의 세계 최고 수준 리그와 팬 문화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축구의 승리만이 아닌, 사회 전체가 하나의 문화를 성장시키고 치유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축구 사랑은 그 깊이와 넓이에서 단연 독보적이며, 우리가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