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종종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죽어도 선더랜드(Sunderland 'Til I Die)》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가장 리얼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축구팀의 성적 부진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담아낸 것은 지역 사회의 희망과 좌절, 클럽과 팬의 애증, 나아가 현대 축구 비즈니스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승격과 강등,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는 팀을 통해, 우리는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사람들의 정체성과 운명에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무엇이 이 팀을 이토록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팬들은 "죽어도 선더랜드"라고 외치는가. 이 이야기를 지금부터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몰락한 명문 – 프리미어리그에서 리그1까지
한때 프리미어리그에서 경쟁하던 선더랜드 AFC는 잉글랜드 북동부의 전통 있는 구단이었습니다. 오랜 역사와 열정적인 팬층을 가진 팀이었지만, 구단의 경영 실패와 연이은 감독 교체, 부진한 선수 영입 등이 겹치며 2017년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당한 뒤, 이 다큐멘터리는 그 다음 시즌부터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단순히 ‘강등된 팀의 고난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현대 축구의 치열한 자본 논리와, 그로 인해 소외되는 지역 클럽의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다큐는 시즌 내내 혼란스러운 구단 운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새로운 오너가 들어오고, 재정 재건을 위해 인기 선수들이 떠나는 과정에서 팬들의 분노와 절망이 터져 나옵니다. 감독은 흔들리고, 선수단은 동요하며, 클럽 내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모든 상황이 단지 ‘실패’로 단순화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몰락은 구단이 상징하는 도시 전체의 자화상처럼 보입니다. 쇠락한 공업 도시, 줄어든 일자리,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 세대.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축구’인 사람들. 선더랜드의 몰락은 그저 스포츠 팀의 이야기가 아닌, 지역 공동체의 삶의 무게를 담고 있는 상징이 됩니다.
축구는 종교다 – 팬이 곧 구단인 도시
선더랜드라는 도시에서 축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일부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는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경기장 안의 선수들이 아니라, 그 경기를 보고, 믿고, 실망하면서도 절대 등을 돌리지 않는 팬들의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그들의 응원, 분노, 좌절, 기대, 그리고 사랑까지 세밀하게 담아냅니다. 선더랜드 팬들은 그 어느 구단보다도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팬들의 감정을 억지로 미화하거나 극적으로 연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정하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보여주며, 시청자로 하여금 ‘나였다면 어떨까’를 상상하게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소년, 경기 패배 후 술집에서 고개를 떨구는 아버지, 라디오에서 팀 이야기를 하며 울컥하는 노인. 이 모두는 단순한 팬이 아니라, 축구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죽어도 선더랜드’라는 구호는 단순한 구단 슬로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인생 철학입니다. 비록 성적은 바닥을 치고, 구단은 위기를 맞지만, 팬들은 팀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응원하고, 자신들의 돈과 시간을 클럽을 위해 기꺼이 투자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팬들의 사랑을 과장 없이 진심으로 담아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팬심’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를 실감하게 합니다.
축구의 자본화 – 누구를 위한 구단인가
《죽어도 선더랜드》는 동시에 현대 축구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비추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수십억의 중계권 수익이 오가는 시대에, 한편에서는 구단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팬들에게 유니폼 가격을 올려받고, 스타 선수를 팔아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운영 문제’가 아니라, 축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특히 시즌2에서는 새로운 오너 체제가 들어서며, 선더랜드 구단이 보다 ‘비즈니스적으로’ 운영되려는 움직임이 나옵니다. 마케팅 전략, 티켓 수익, 상업적 스폰서 등 모든 영역이 숫자로 환산됩니다. 하지만 정작 선수단 내부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팬들은 자신의 구단이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소외감을 느낍니다. 다큐는 이러한 ‘자본과 정체성 사이의 충돌’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됩니다. 축구 클럽은 단순한 기업이 될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투자 대상이나 상품으로 보지 않습니다. 팬들에게 구단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축구의 자본화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클럽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임을 망각하게 되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인간 드라마로서의 축구 – 절망 속에서도 계속 걷는 이유
《죽어도 선더랜드》의 진짜 감동은, 계속해서 실패하는 팀을 따라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다큐는 승리를 향한 도전, 극적인 결승골, 마지막 순간의 감동에 초점을 맞추곤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정반대의 흐름을 택합니다. 거의 모든 시즌이 좌절로 끝나며, 영웅적인 반전도 드물고, 팬들이 원하는 성적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는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고문 같던 경기들,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부상자 발생, 팬들이 기대했던 이적이 무산되는 순간들, 아무런 준비 없이 발표되는 감독 교체 등의 장면들은 마치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실패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팀은 이기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지만, 이기지 못해도 훈련은 계속되고, 경기는 치러지고, 팬들은 경기장으로 향합니다. 선수들 역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필드에 서고, 감독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압박 속에서도 팀을 일으켜 세우려 합니다. 그 모든 ‘계속함’의 반복은 어떤 장대한 승리보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한 후, 어린 소년이 조용히 유니폼을 벗어 놓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입니다. 그는 그저 한 경기를 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날의 패배를 통해 자신의 꿈, 정체성, 자존심까지도 꺾이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에게 선더랜드는 그저 좋아하는 팀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 주에도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또 한 번의 경기장으로 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팀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 서사’가 얼마나 한정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오히려 진정한 인간 드라마는 지속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기지 못해도, 사랑이 식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고민하고, 좌절하면서도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 그 모든 것들이 진짜 스포츠 정신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의지이기도 합니다. 축구는 결과만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그 안에는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어도 선더랜드》는 축구를 가장 인간적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패배하는 법, 감정을 다스리는 법,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계속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선더랜드의 팬들은 경기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 구단을 지탱하는 버팀목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의 존재 덕분에 이 팀은 단순한 스포츠 클럽을 넘어선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시청자로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들의 싸움을 단지 구경하는 입장이 아니라, 함께 염려하고 기도하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가 끝난 순간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시즌을 상상하게 됩니다. ‘선더랜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결국 이 다큐멘터리는 단 한 가지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기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실패해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스포츠가 주는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자, 인간이라는 존재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힘입니다.
결론: 선더랜드는 모든 도시의 이야기다
《죽어도 선더랜드(Sunderland ’Til I Die)》는 단지 축구팀의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시의 초상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기억이자 감정의 기록입니다. 축구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실패에 익숙해진 도시, 그리고 그 실패를 매주 반복해서 체감하면서도 팀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 이 다큐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승패라는 단순한 결과를 넘어서 삶의 방식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선더랜드는 한때 산업화의 중심지였고, 조선소와 석탄 산업의 붕괴 이후 무너진 지역 경제 속에서도 축구만은 자부심이자 희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큐는 바로 그 무너진 세계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는 끈, 즉 ‘선더랜드 AFC’라는 존재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주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단지 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고, 살아 있음을 확인받으려 하며, 무엇보다도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함 속에서 응원가를 부릅니다.
‘죽어도 선더랜드’라는 문장은 그래서 단순한 충성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도시와 함께한다는 결심”이자 “이 실패를 감당할 용기”에 대한 선언입니다.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아침에도 출근길에서 팀 이야기를 나누고, 승리를 못했어도 아이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는 아버지들, 유니폼을 벗지 않고 주말을 보내는 어머니들. 이들은 모두 축구를 통해 공동체를 이어가고, 일상 속에서 존엄을 지켜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다큐가 단지 스포츠 다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경기장 밖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효율성 중심의 경영이 클럽을 지배합니다. 팬들의 목소리는 ‘시장논리’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자주 무력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거대한 체계 속에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싸우고, 변화를 요구하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꿉니다. 그것이 선더랜드 팬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끈질김이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진짜 스포츠 정신’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스포츠가 단지 성적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 문화와 연대의 공간임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잉글랜드 리그1이라는 낮은 리그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더랜드 팬들의 응원은 결코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응원은 성적에 따라 조건부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종교처럼 삶의 일부로 녹아 있는 실천 행위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현대 스포츠가 잊지 말아야 할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 다큐를 통해 비로소 ‘패배’가 단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포기하지 않음’이 얼마나 숭고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선더랜드의 연패 기록과 추락의 서사에서 우리는 오히려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승자가 아닌 자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더 진실하며,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래서 《죽어도 선더랜드》는 축구 팬만을 위한 작품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꿈꾸다 좌절한 사람, 현실에 부딪혀 주저앉은 사람, 무너진 이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리고 다시 일어서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다정하지만 단단한 위로입니다. 삶이란 곧 싸움이며, 그 싸움의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는 사실을 이 다큐는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선더랜드라는 도시는 어쩌면 우리 각자의 내면일지도 모릅니다. 무너지고, 버려지고, 외면당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싸우고 있으며,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전부인 곳.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경기 결과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계속 싸우고 있는가?”
그리고 그 답을 스스로 되묻는 순간, 이 다큐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질문은 곧 당신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